Advertisement
Top Banner Ad(reader-top)
잘라 낸 기능 하나가 잔존율을 뒤집었다 일러스트

잘라 낸 기능 하나가 잔존율을 뒤집었다

새벽 여섯 시가 넘었는데도 개발실 천장은 아직 밤처럼 푸르렀다.

정면 유리벽 너머 회의실 불은 꺼져 있었고, 왼쪽 테스트폰 선반에는 결제 오류를 잡느라 밤새 켜 둔 단말기들이 같은 로비 화면을 지친 듯 반복하고 있었다. 오른쪽 서버 랙 앞 바닥에는 뜯어낸 케이블 타이와 빈 커피 캔이 굴러다녔고, 맨 안쪽 운영 모니터 하단에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회색 아이콘 하나가 박혀 있었다.

`궤도 기록`.

밤새 결제창을 꺼 버린 뒤에도 결국 내 눈을 끝까지 붙잡은 건 그 이름이었다.

미래 문서가 남긴 경고는 단순했다. 튜토리얼 이탈률 68퍼센트, 1일차 잔존율 19퍼센트.

지금 내 목표도 단순했다. 왜 저 숫자가 떴는지 찾아낸다. 그리고 오픈 전에 `궤도 기록`을 다시 살릴 수 있는지 확인한다.

실패하면 결제 장애를 막아도 이 게임은 재미없어서 죽는다.

한도겸은 서버 로그 창을 닫고 의자를 뒤로 밀었다.

“대표님, 아직 안 들어가셨습니까.”

“도겸 씨도 안 갔네요.”

“결제 모듈 뜯어 놓고 집에 가면 더 불안합니다.”

그는 내 시선을 따라 운영 모니터 아래를 봤다. 피곤에 젖은 눈빛이 회색 아이콘 위에서 한 번 멈췄다.

“그 아이콘 때문이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해 주세요. `궤도 기록`이 정확히 뭐였는지.”

도겸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말 대신 짧은 한숨이 먼저 나왔다.

“초기 빌드 핵심 기능이었습니다. 플레이어가 튜토리얼에서 지나간 동선을 자동으로 기록하고, 첫 지역을 크게 한 바퀴 돌면 자기 항로가 생깁니다. 그 항로를 기준으로 보상 이벤트랑 짧은 무전 대사가 열렸고요.”

“지금 빌드엔 왜 없죠?”

“무거웠습니다.”

그는 잠깐 말을 고쳤다.

“아니, 정확히는 무겁다고 판단됐습니다.”

뒤쪽에서 태블릿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윤해원이 커피 종이컵을 들고 다가오더니 내 오른쪽 책상 끝에 몸을 기대었다.

“무겁기만 한 게 아니었어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원래 튜토리얼 첫 장면이 훨씬 넓었거든요. 유저가 부서진 정거장 바깥 고리를 직접 돌면서 길을 익히게 돼 있었어요. 그런데 일정 줄이고, 첫 과금 노출 앞당기고, 초반 이탈을 숫자로만 겁내면서 다 잘렸죠. 지금은 그냥 복도 따라 뛰다가 패키지 창 먼저 보는 구조예요.”

나는 다시 회색 아이콘을 봤다.

결제 오류는 게임을 망가뜨리는 사고였다. `궤도 기록`은 그보다 더 질긴 문제였다.

사고가 아니라, 재미가 사라진 흔적.

“초기 빌드 남아 있습니까?”

도겸이 내 얼굴을 잠깐 살폈다.

“백업 서버엔 있을 겁니다. 다만 열리더라도 그대로 못 씁니다. 아트 리소스도 빠졌고, 동기화 로직도 옛날 방식이라 지금 클라이언트랑 안 맞아요.”

“그래도 봐야 합니다.”

해원은 곧장 태블릿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렸다. 오래된 컨셉 시트 몇 장이 떠 있었다.

반쯤 깨진 우주 정거장 외벽 위로 푸른 선이 얇게 이어지고, 플레이어 발밑에는 지나간 자리마다 잔광이 남아 있었다. 어둡고 차가운 배경 위에 그 선만 또렷하게 살아 있어서, 한 장의 이미지인데도 ‘내가 길을 만든다’는 감각이 먼저 들어왔다.

“이게 원래 궤도 기록 시각안이에요.”

해원이 말했다.

“유저가 튜토리얼을 통과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직접 항로를 새긴다는 느낌이 있었죠.”

그 그림은 지금 서비스 빌드의 밋밋한 회색 복도보다 훨씬 먼저 이야기를 걸어왔다.

나는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백업 엽시다.”

도겸이 바로 움직이지 않자 내가 덧붙였다.

“결제 버그는 회사가 죽는 방식이었고, 이건 게임이 죽는 방식입니다. 둘 다 막아야 해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도겸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서버 랙 오른쪽 좁은 통로로 걸어갔다. 해원도 말없이 따라붙었고, 나도 그 뒤를 따라 백업 장비가 모여 있는 작은 자료실로 들어갔다.

자료실은 개발실보다 더 답답했다.

정면 철제 선반에는 연도별 빌드 백업 디스크가 라벨도 반쯤 벗겨진 채 꽂혀 있었고, 왼쪽 낡은 NAS 위에는 먼지 앉은 미니 팬이 삐걱거리며 돌고 있었다. 오른쪽 벽에는 출시 직전 폐기된 기능 목록이 포스트잇으로 겹겹이 붙어 있었는데, 노란 종이 한 장에 검은 글씨로 `궤도 기록 - 보류 후 삭제`가 적혀 있었다.

“보류 후 삭제?”

내가 묻자 도겸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회사 표현입니다. 사실상 사형 선고죠.”

해원이 포스트잇 한 귀퉁이를 손끝으로 튕겼다.

“처음엔 보류였어요. 출시 첫 달 지표 보고 다시 붙이자고 했죠. 그런데 그 첫 달이 오기 전에 다들 회사부터 정리할 준비를 했으니까.”

그 말은 길지 않았지만, 네뷸라 랩스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설명하기엔 충분했다.

도겸은 NAS를 켜고 예전 아카이브 폴더를 열었다. 날짜가 세 달 전으로 돌아간 빌드 디렉터리 안에서 `Orbit_LogPrototype`라는 폴더명이 떠올랐다.

“열립니다.”

해원이 작게 말했다.

그 한마디에 방 안 공기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죽은 줄 알았던 기능이 실제로는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이 방 사람들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우리는 다시 개발실로 돌아와 테스트용 PC 하나를 분리했다.

정면 메인 모니터에는 초기 빌드가, 왼쪽 보조 모니터에는 현재 오픈 빌드가 동시에 떴다. 오른쪽에는 로그 창과 리소스 사용량 그래프가 나란히 올라왔고, 뒤쪽 테스트폰 선반 아래엔 아직 열이 식지 않은 단말기들이 줄지어 켜져 있었다.

나는 현재 빌드부터 실행했다.

튜토리얼은 빨랐다. 빨라서 더 삭막했다.

정거장 입구에서 복도 하나를 따라 이동하고, 전투 한 번, 클릭 두 번, 설명창 세 개. 공간을 읽을 틈도 없이 패키지 창이 거의 바로 튀어 올랐다.

해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가 만든 게임 같지가 않죠.”

도겸은 반박하지 않았다.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이번엔 초기 빌드를 켰다.

로딩이 끝나자 화면이 넓게 열렸다. 정면 아래로는 부서진 정거장 외벽이 반원처럼 휘어 있었고, 왼쪽 먼 우주에는 파편대가 느리게 흘렀다. 오른쪽에는 손상된 통신탑이 비스듬히 꺾여 있었고, 중앙 바닥에는 플레이어 발밑을 따라 얇은 푸른 선 하나가 잠들어 있었다.

나는 마우스를 잡았다.

캐릭터를 정면 난간 쪽으로 움직이자 발밑 선이 뒤따라 그어졌다. 왼쪽 잔해 더미를 크게 돌아 통신탑 아래까지 가자 선이 반원을 만들었고, 화면 상단엔 `항로 안정화 32%`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바로 다음 순간, 현재 빌드엔 없던 무전 대사가 흘렀다.

“항로가 잡혀. 이 길이면 우회 전력이 살아 있을지도 몰라.”

해원이 내 옆에서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이거예요.”

도겸이 보조 모니터로 로그를 훑었다.

“플레이어가 그냥 시키는 대로 직진하는 게 아니라, 직접 공간을 읽고 돈다는 감각이 생깁니다. 그래서 튜토리얼이 설명이 아니라 탐사처럼 느껴졌죠.”

나는 말없이 한 바퀴를 더 돌았다.

항로가 원형에 가까워지는 순간, 정거장 측면에 숨어 있던 보급함 하나가 열렸다. 자원 몇 개와 짧은 설정 문장이 떴다. 보상 자체는 크지 않았는데도, 방금 내가 공간을 읽어냈다는 확신이 손에 남았다.

현재 빌드와 가장 큰 차이가 거기 있었다. 지금 튜토리얼은 유저가 지시를 소비한다.

원래 빌드는 유저가 자기 판단으로 길을 찾았다고 믿게 만든다.

“왜 이걸 잘랐죠?”

이번엔 해원이 먼저 대답했다.

도겸은 초기 빌드를 멈추지 않고 그대로 한 바퀴 더 돌려 봤다. 항로선이 조금씩 진해질수록 무전 대사도 짧게 바뀌었고, 통신탑 아래를 크게 돌았을 때만 열리는 보급함이 있다는 사실까지 확인되자 그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이걸 자른 시점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십니까?”

내가 묻자 도겸이 대답했다.

“출시 5주 전쯤이었습니다. 성능 이슈 보고가 한 번 올라왔고, 그 뒤에 일정 회의가 길게 열렸죠.”

해원이 바로 말을 받았다.

“성능만 이유는 아니었어요. 당시 기획실에서 돌린 자료에 `첫 과금 노출까지 평균 2분 40초 단축 가능`이라고 적혀 있었거든요. 궤도 기록을 빼면 동선이 짧아지고, 첫 패키지 팝업을 더 빨리 세울 수 있다고.”

나는 보조 모니터 위에 남아 있던 옛 회의 폴더를 열었다. 파일명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Launch_Funnel_Shorten_v3`

`Tutorial_Cut_Candidate`

`FirstPurchase_Acceleration`

이름만 봐도 무슨 선택이 오갔는지 알 수 있었다.

파일 하나를 열자, 흰 배경 표 한가운데 붉은 글씨가 먼저 박혔다.

`튜토리얼 1분 50초 단축 시 첫 결제 도달률 +0.6% 예상`

`궤도 기록 제거 시 리소스 안정화, QA 공수 18% 절감`

`탐사 감각 저하 리스크: 중간`

중간.

게임의 심장을 잘라 내고 붙인 라벨치고는 너무 가벼운 단어였다.

해원이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비웃음에 가까웠다.

“그때 내가 반대했어요. 근데 아트가 일정 지연 원인으로 찍히던 시기라, 끝까지 밀진 못 했죠. `출시하고 다시 붙이자`는 말이 얼마나 자주 거짓말이 되는지 알면서도.”

도겸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저도 사인했습니다. 당시엔 결제 구조랑 서버 안정화만 해도 벅찼거든요. 한 번 더 런칭 미끄러지면 회사 끝난다는 말이 매일 들렸습니다.”

그 말 뒤로 잠깐 정적이 내려앉았다.

누가 틀렸는지 따지는 건 쉬웠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책임 추궁이 아니라, 그때 잘라 낸 걸 지금 어떤 값으로 다시 붙일 수 있는지 계산하는 일이었다.

나는 회의 폴더를 닫고 현재 빌드와 초기 빌드를 다시 번갈아 띄웠다.

“좋아요. 그럼 더 분명해졌네요.”

내가 말했다.

“우린 기능을 되살리는 게 아니라, 당시 잘못 계산한 우선순위를 뒤집는 겁니다. 첫 결제를 40초 당기는 대신 하루 뒤 절반이 떠나는 구조를 다시는 못 쓰게 만드는 거죠.”

해원이 팔짱을 풀었다.

“그 말이면 아트팀 설득할 명분은 생겨요.”

도겸도 화면 아래 로그 구간을 가리켰다.

“기술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체 복구는 무리라도, 왜 이 기능을 남겨야 하는지는 설명할 수 있어요.”

나는 보급함이 열리는 지점을 다시 재생했다. 유저가 보상을 받는 순간보다, 그 직전 한 박자 먼저 찾아오는 감각이 더 중요했다. `내가 방금 이 공간을 읽었다`는 확신.

그 지점에서 튜토리얼은 설명을 멈추고 게임이 되었다.

“수치 목표부터 다시 잡죠.”

나는 화이트보드 한쪽에 새 줄을 그었다.

`튜토리얼 완주율 60% 이상`

`평균 세션 20분 이상`

`첫 과금 노출 지연 1분 이내`

“이 세 개를 동시에 맞추면 됩니다. 하나만 지키는 방향으로는 안 갑니다.”

도겸이 그 숫자를 보고 낮게 중얼거렸다.

“욕심 큰데, 할 만한 욕심이네요.”

“윗선이 첫날 과금 전환만 빨리 보자고 했어요. 튜토리얼이 길면 패키지 노출이 늦어진다고.”

도겸이 이어받았다.

“그리고 이 기능 유지하려면 동선 기록, 간단한 분기 이벤트, 리소스 스트리밍이 같이 붙습니다. 일정 터진다고 다들 겁냈죠. 정확히는, 겁내기 시작한 순간부터 아무도 끝까지 지키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현재 빌드와 초기 빌드를 번갈아 봤다.

과금 동선을 앞당기려고 재미를 잘라 냈다. 그러고 나서 잔존율이 떨어지면 유저 취향 탓, 시장 탓, 광고 탓으로 돌렸겠지.

너무 익숙해서 더 역겨운 실패 방식이었다.

그때 뒤쪽에서 조심스럽게 목소리가 들렸다. 밤새 남아 있던 QA 팀 막내였다.

“대표님, 저도 한번 해 봐도 됩니까?”

“해 보세요.”

그녀는 현재 빌드를 4분도 안 돼 끝냈다. 설명창이 많고, 첫 패키지 창이 너무 빨리 튄다는 말만 남겼다.

초기 빌드는 달랐다.

첫 바퀴를 어설프게 돌다가 길을 놓쳤고, 두 번째엔 스스로 통신탑 쪽을 더 크게 돌아봤다. 숨은 보급함을 찾는 순간 얼굴이 확실히 풀렸다.

“어? 이건 다시 해 보고 싶은데요.”

도겸과 해원이 동시에 그 테스터를 봤다.

테스터는 괜히 변명하듯 덧붙였다.

“전투가 엄청 화려한 건 아닌데, 방금 제가 놓친 길이 있는 것 같아서요. 아까 버전은 빨리 넘어가고 싶었는데, 이건 다음 구역도 보고 싶네요.”

그 말이면 충분했다.

숫자가 아직 다 모이기 전인데도, 왜 미래 문서에 68퍼센트가 떴는지 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유저는 튜토리얼에서 강해지고 싶은 게 아니라, 먼저 자기 선택이 남는다는 감각을 원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이트보드 앞으로 갔다.

정면 한가운데 `궤도 기록`이라고 크게 적고, 그 아래를 세 줄로 나눴다.

`반드시 살릴 것`

`버릴 것`

`오픈 후로 미룰 것`

“전체 복구는 안 합니다.”

도겸이 즉시 물었다.

“그럼 뭘 남기죠?”

“플레이어가 자기 길을 그린다는 감각만 살립니다.”

나는 첫 칸에 차례로 적었다.

`발밑 항로 시각화`

`첫 원형 완성 보상`

`통신탑 무전 대사`

`숨은 보급함 1개`

그리고 두 번째 칸에 적었다.

`전체 지역 항로 저장`

`소셜 공유`

`고급 리플레이`

`심화 통계 시각화`

마지막 칸엔 이렇게 적었다.

`2구역 확장 분기`

`개인 항로 비교`

`주간 미션 연동`

해원이 눈썹을 올렸다.

“아트는요?”

“새 맵 안 만듭니다. 지금 있는 정거장 외곽 구간 안에서 카메라와 광원만 다시 잡아요. 유저가 넓다고 느끼게 하면 됩니다.”

“연출이 허전하면요?”

“한 장면만 세게 갑시다. 첫 바퀴 완성되는 순간, 유저가 ‘아, 내가 방금 이 공간에 흔적을 남겼구나’ 하고 바로 느끼는 장면.”

해원은 잠깐 입술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만들 수 있어요.”

도겸도 화이트보드를 보며 계산을 시작했다.

“동선 기록을 단말 저장 위주로 돌리고, 서버엔 첫 완성 여부만 보내면 부하는 줄일 수 있습니다. 이벤트 트리거도 원형 판정 하나로 묶으면 되고요. 대신 QA는 다시 해야 합니다.”

“합니다.”

“운영 쪽은 싫어할 겁니다. 튜토리얼 패키지 노출이 뒤로 밀리니까요.”

“패키지 노출이 40초 늦어지는 대신 하루 만에 절반이 안 나가면, 그게 더 비쌉니다.”

나는 마커를 내려놓았다.

“우리가 살려야 할 건 기능이 아니라 이유예요. 유저가 이 게임을 계속할 이유.”

해원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방금 말은 마음에 드네요.”

그녀는 태블릿을 켜고 바로 레이어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정거장 외벽 하이라이트 다시 잡고, 항로선은 너무 UI처럼 딱딱하지 않게 가죠. 지나간 자리에 잔광이 남는 느낌이면 돼요. 플레이어가 ‘선이 뜬다’보다 ‘내가 흔적을 남겼다’고 받아들여야 하니까.”

도겸도 곧장 명령창을 열었다.

“기록 좌표 단순화하고, 이벤트 트리거는 원형 판정 하나로 줄입니다. 숨은 상자는 첫 완성 때만 열고요. 저사양 기기 한 대는 따로 계속 돌려 보겠습니다.”

나는 그 둘 사이에 서서 작업 순서를 잘게 쪼갰다.

해원에게는 장면 하나를 맡겼다. 유저가 첫 바퀴를 완성했을 때 자기 길이 화면에 살아 있다는 걸 한눈에 느끼게 만드는 것.

도겸에게는 규칙 하나를 맡겼다. 서버가 무너지지 않으면서도 플레이 감각은 남는 최소 구조를 만드는 것.

나머지 팀에는 테스트 우선순위를 새로 배분했다. 결제 모듈 핫픽스는 병렬 유지, 튜토리얼 복구는 소규모 전담, QA는 현재 빌드와 복구 빌드를 동시에 비교.

그렇게 작업이 다시 시작됐다.

작업이 본격화되기 전에 나는 팀을 짧게 한 번 더 모았다.

정면 화이트보드 앞, 왼쪽에는 해원이 뽑아 온 옛 컨셉 출력물 두 장을 붙였고 오른쪽에는 현재 튜토리얼 캡처를 나란히 세웠다. 가운데에는 아까 적은 수치 목표를 다시 크게 써 놓았다.

“지금부터 중요한 건 취향 싸움이 아닙니다.”

나는 현재 빌드 캡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쪽은 설명이 빠르고 패키지 노출이 빠릅니다. 대신 유저가 공간을 기억할 이유가 없어요.”

이번엔 옛 컨셉 시트를 가리켰다.

“이쪽은 첫 3분 안에 `내가 직접 길을 찾았다`는 감각을 줍니다. 우리가 살릴 건 바로 그 감각입니다.”

QA 쪽에서 누군가 물었다.

“그럼 테스트 기준도 바꿔야 합니까?”

“바꿉니다. 오늘은 버그 개수만 세지 말고, 첫 바퀴를 자발적으로 완성하는 비율, 보급함 발견 뒤 다음 구역 진입까지 걸리는 시간, 패키지 팝업이 거슬린다고 느끼는 지점까지 같이 적어 주세요.”

해원이 그 말을 듣고 바로 메모를 더했다.

“시각 쪽도 동일하게 볼게요. 선이 예뻐 보이는지보다, 유저가 그 선을 자기 흔적으로 받아들이는지 확인해야 해요.”

도겸은 명령창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기술 쪽은 저사양 프레임만 보지 않겠습니다. 선이 끊기면 감각이 먼저 죽어요. 숫자보다 체감이 먼저 무너지는 구간을 같이 체크하죠.”

그 짧은 대화가 끝나자 팀의 시선이 처음으로 같은 곳을 봤다. 어젯밤까지는 다들 `무엇이 터질지`만 보고 있었다면, 지금은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회사를 살리는 건 늘 이런 순간부터 시작됐다. 사람마다 다른 언어로 싸우던 팀이, 한 번 같은 목적어를 보기 시작하는 순간.

이번엔 밤새 장애를 막던 공기와 분명히 달랐다. 키보드 소리는 여전히 다급했지만, 적어도 지금은 모두가 뭘 없애는지가 아니라 뭘 살리는지 알고 움직였다.

누군가는 항로선 투명도를 조절했고, 누군가는 통신탑 무전 대사 발동 타이밍을 줄였고, 누군가는 보급함 위치를 난간 그림자 쪽으로 옮겼다. 테스트폰 선반 앞에 선 QA는 체크리스트 대신 실제 플레이 감상을 먼저 적기 시작했고, 해원은 컨셉 시트를 보며 남은 리소스로 가장 넓어 보이는 구도를 골랐다.

나는 중간중간 오른쪽 시야에 겹쳐 뜨던 반투명 문서를 떠올렸다.

수치는 경고였지만, 답은 늘 현재 팀 안에 있었다. 내가 먼저 보는 건 미래 로그일 뿐이고, 실제로 회사를 살리는 건 결국 이 방 안 사람들의 손이었다.

오전 아홉 시가 조금 넘었을 때 첫 축소 복구 빌드가 나왔다.

정면 메인 모니터에는 새 빌드, 왼쪽에는 수집 대시보드, 오른쪽에는 튜토리얼 완료율 비교표를 띄웠다. 테스트폰 여섯 대가 책상 위에 반원으로 세워졌고, 팀원들이 각자 하나씩 집어 들었다.

“시작합니다.”

도겸이 말했다.

첫 테스트는 엉망이었다. 항로선이 벽에 박히고, 숨은 상자가 너무 일찍 열렸다.

두 번째 테스트에선 무전 대사가 겹쳤고, 세 번째에선 저사양 기기 하나가 프레임 드랍을 냈다. 하지만 네 번째부터 달라졌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테스트에선 더 선명한 차이가 나왔다.

현재 빌드를 먼저 잡은 테스터는 설명창을 넘기면서도 시선이 자꾸 오른쪽 위 스킵 버튼 근처로 갔다. 반면 복구 빌드를 잡은 테스터는 난간 바깥 파편대와 통신탑 그림자 쪽을 한 번 더 확인했고, 누가 말하지 않아도 발걸음이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같은 3분인데 체감이 완전히 달랐다. 하나는 빨리 지나가고 싶은 튜토리얼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직 끝내기 싫은 첫 지역이었다.

QA 체크시트 옆 메모란에도 숫자 말고 문장이 쌓였다.

`보급함 찾고 나서 다음 구역 궁금해짐`

`패키지 창이 나와도 흐름이 덜 끊김`

`항로선 켜질 때 내가 뭘 한 느낌이 남음`

나는 그 짧은 문장들을 보며 확신했다. 잔존율은 결국 사람 감정의 다른 이름이었다.

결국 유저를 붙잡는 건 설명의 양이 아니라, 내가 이 세계에 흔적을 남겼다는 첫 확신이었다. 그 한 번의 확신이 다음 클릭을 만들고, 다음 구역을 보게 하고, 하루 뒤 다시 돌아오게 만든다. 숫자는 그 감정을 뒤늦게 번역한 결과였다. 전부였다, 정말.

테스터들이 설명창을 빨리 넘기지 않았다. 한 번 돈 사람이 다시 반대쪽 벽면도 확인했고, 통신탑 아래 보급함을 찾은 뒤엔 자연스럽게 다음 구역 진입 버튼을 눌렀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공간을 한 번 더 훑었다. 그게 제일 중요했다.

해원은 화면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제야 Orbit 같네.”

도겸은 수치 창을 새로고침했다.

“튜토리얼 완주율 31에서 67.”

그는 한 번 더 값을 확인했다.

“평균 세션 길이 11분에서 23분. 첫 이탈 지점이 패키지 창 직전에서 첫 항로 완성 이후로 밀렸습니다.”

방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

너무 짧은 시간 안에 튀어 오른 수치라서, 오히려 누구도 쉽게 환호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들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믿기 시작하는 얼굴.

내가 입을 열었다.

“1일차 잔존 예측은?”

도겸이 예측표를 돌렸다.

“간이 모델 기준 34퍼센트까지는 보입니다. 아직 표본 작습니다. 그래도… 19는 벗어납니다.”

이번에는 정말로 여기저기서 숨죽인 웃음이 터졌다.

누군가는 주먹을 쥐었고, QA 막내는 자기 폰 화면을 다시 보며 “이거면 친구한테도 보여 줄 만하다”라고 중얼거렸다. 해원은 의자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가, 다시 화면을 보며 아주 작게 웃었다.

나는 웃지 않았다. 대신 오른쪽 시야에 다시 겹쳐 뜬 반투명 문서를 봤다.

조금 전까지 있던 잔존율 경고 문장이 서서히 흐려지고 있었다.

[튜토리얼 이탈률 급락 위험 완화]

[1일차 잔존율 예측 상향]

그 아래에 새 항목이 밀려 올라왔다.

[신규 위험 예측]

[빌드 용량 1.92GB 초과 가능]

[운영 일정 충돌 / 스토어 심사 지연 위험]

나는 표정을 굳혔다.

해원이 먼저 눈치챘는지 물었다.

“또 떴어요?”

“이번엔 잔존율이 아닙니다.”

도겸도 모니터에서 고개를 들었다.

“뭡니까.”

나는 메인 화면 오른쪽 아래의 리소스 사용량 그래프를 가리켰다. 항로 연출을 다시 넣으면서 스트리밍 묶음이 커졌고, 운영 빌드 일정표엔 오늘 오후 심사 제출 시간이 빨갛게 박혀 있었다.

“우리가 게임을 살리니까, 이번엔 일정이 죽으려고 하네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개발실 문이 열렸다.

복도 쪽 밝은 형광등이 안으로 길게 들어오고, 문간에 운영팀장이 서 있었다. 정면 메인 모니터와 리소스 그래프를 본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잠깐만요.”

그녀가 빠르게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누가 튜토리얼 빌드를 다시 갈아엎었죠? 이 용량이면 오늘 스토어 심사 못 넣습니다.”

방 안의 공기가 다시 팽팽해졌다.

해원이 태블릿을 내려놓았고, 도겸은 의자째 몸을 돌렸다. 나는 회색 아이콘이 있던 운영 모니터 아래를 한 번 보고, 운영팀장을 향해 돌아섰다.

결제창은 막았다.

재미도 겨우 살렸다.

이제 남은 건, 이 살아난 게임을 정말 세상 밖으로 밀어내는 싸움이었다.

작가의 말

연재 중

Advertisement
Bottom Banner Ad(reader-bottom)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주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