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린 재미 때문에, 오늘 심사를 날릴 수는 없었다
아침 여덟 시 반, 네뷸라 랩스 회의실 유리벽은 밤새 식지 못한 개발실 불빛을 탁하게 받아내고 있었다.
정면 벽면 스크린에는 조금 전까지 튜토리얼 반등 수치가 떠 있었고, 왼쪽 긴 테이블 위에는 식지 않은 편의점 커피와 테스트폰 여섯 대가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었다. 오른쪽 화이트보드엔 내가 새벽에 적어 둔 `반드시 살릴 것 / 오늘 버릴 것 / 오픈 후 되찾을 것` 세 줄이 아직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문제는 그 아래에 방금 붙은 빨간 출력물이었다.
`스토어 심사 제출 마감 D-0, 오늘 14:00`
`현재 패키지 예상 용량 1.92GB`
`피처드 슬롯 유지 조건: 당일 제출 필수`
잔존율을 살려 놓았더니, 이번엔 일정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회의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짙은 남색 셔츠 위에 사원증을 비틀어 건 여자가 가장 먼저 들어왔다. 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밤을 새운 사람 특유의 붓기는 있었지만 눈만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한 손엔 스토어 심사 체크리스트가, 다른 손엔 태블릿이 들려 있었다.
운영팀장 오민서였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태블릿을 테이블 위로 밀어 놓았다.
“대표님, 이 빌드 그대로는 오늘 심사 못 넣습니다.”
한도겸이 의자째 몸을 돌렸다.
“용량 때문에요?”
“용량만이면 밤새 갈아도 되죠.”
오민서는 태블릿 화면을 넘겼다.
“패키지 용량, 리소스 번들 구성, 첫 다운로드 구간, 사전예약 보상 이미지 세트까지 전부 엉켜 있습니다. 이 상태로 제출하면 피처드 슬롯 날아갑니다. 슬롯 날아가면 이번 런칭은 광고비를 두 배 태워도 복구 안 돼요.”
윤해원이 곧장 받아쳤다.
“그럼 다시 자르자는 말입니까? 어젯밤에 겨우 살린 걸.”
“전 살리네 마네 하는 감상 얘기하러 온 게 아닙니다.”
오민서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단단했다.
“오늘 못 넣으면 다음 심사 파동까지 밀립니다. 우리 현금으로 그 기간 못 버텨요.”
회의실 공기가 한 번에 말라붙었다.
나는 스크린 쪽으로 걸어갔다. 미래 문서가 떠오르던 자리에 대신 현재 체크리스트를 띄웠다. 내 목표는 세 가지였다. 궤도 기록의 핵심 감각은 남긴다. 오늘 오후 두 시 제출은 지킨다. 그리고 이 회의를 희생양 찾기 회의로 만들지 않는다.
셋 중 하나라도 놓치면, 이 회사는 다시 예전 방식으로 미끄러진다.
“정리합시다.”
내가 말했다.
“지금 문제는 누구 잘못이 아니라, 무엇이 출시를 막고 있는지입니다. 민서 팀장은 운영 기준으로, 도겸 씨는 기술 기준으로, 해원 씨는 유저 경험 기준으로 각각 세 줄만 말해 주세요. 제일 먼저 필요한 것부터.”
오민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첫째, 오늘 두 시 전 제출 필수. 둘째, 첫 다운로드 용량 줄여야 합니다. 셋째, 런칭 페이지에 걸리는 패키지 배너 세트를 빼면 사전예약 전환율이 떨어집니다.”
한도겸이 곧바로 이어받았다.
“첫째, 항로선 연출 자체보다 스트리밍 묶음이 문제입니다. 둘째, 운영용 리플레이 리소스랑 고해상도 패키지 이미지가 같이 들어가서 용량이 불었습니다. 셋째, 지금 다 건드리면 빌드 안정성 검증 시간이 부족합니다.”
윤해원은 팔짱을 낀 채 스크린을 노려보다가 말했다.
“첫째, 튜토리얼 첫 바퀴 감각은 못 자릅니다. 둘째, 항로선만 남기고 주변 배경을 죽이면 그냥 밋밋한 복도로 돌아갑니다. 셋째, 런칭 페이지용 과장 패키지보다 실제 게임 첫인상이 더 중요합니다.”
셋 다 맞았다.
문제는 셋 다 맞는 걸 전부 같은 시간 안에 만족시켜야 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스크린에 현재 패키지 분석표를 띄웠다. 푸른 막대와 회색 막대가 켜지고 꺼질 때마다 회의실 천장 조명이 사람들 얼굴선을 얇게 잘랐다. 왼쪽에는 튜토리얼 리소스, 중앙에는 라이브옵스용 리플레이 번들, 오른쪽에는 마케팅팀이 미리 넣어 둔 고해상도 패키지 세트가 묶여 있었다.
“도겸 씨.”
“네.”
“기술적으로 오늘 빼도 되는 것부터 말해 주세요.”
그는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더니 표 세 줄을 빨갛게 표시했다.
“라이브옵스 리플레이 번들, 이벤트 예고 영상 원본, 고해상도 패키지 배너 백업 세트. 이 셋 빼면 210메가 정도는 바로 내려갑니다.”
오민서가 즉시 고개를 저었다.
“배너 세트 빼면 런칭 페이지 클릭률 떨어집니다.”
“그거 넣다가 심사 자체를 못 넣으면 클릭률 이전 문제죠.”
“심사 넣고 묻히면 똑같습니다.”
둘의 말이 부딪히는 순간, 해원이 테이블 위 출력물을 확 끌어갔다.
“잠깐만요. 이 배너 세트, 왜 4K 원본이 다 들어가 있죠?”
오민서가 짧게 눈을 깜빡였다.
“행사장 외부 스크린 대응본까지 한 번에 묶어 둔 겁니다.”
“지금 모바일 스토어 심사인데요?”
“론칭 당일 자산 분실 나면 누가 책임집니까.”
해원이 웃지도 못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 책임 때문에 게임 본편을 또 자르자는 거예요?”
그 문장 하나로 갈등의 진짜 모양이 드러났다.
민서는 슬롯을 지키려 했다. 해원은 게임의 얼굴을 지키려 했다. 도겸은 둘 다 건드리면 시스템이 무너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셋 다 잃을 수도 있는 자리에 서 있었다.
미래 문서에 기대고 싶은 충동이 잠깐 올라왔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아직 오지 않은 화면이 아니라, 회의실 안에서 누가 무엇을 지키려 하는지 읽는 일이었다.
나는 화이트보드 앞으로 가서 마커 뚜껑을 열었다.
정면 중앙에 크게 세 칸을 그었다.
`오늘 살릴 것`
`오늘 버릴 것`
`출시 후 되찾을 것`
“기준은 하나입니다.”
나는 첫 칸 맨 위에 `첫 플레이 감각`이라고 적었다.
“유저가 첫 세 분 안에 Orbit을 기억하게 만드는 요소는 남깁니다.”
그 아래에 `항로선`, `첫 원형 완성 연출`, `통신탑 무전`, `숨은 보급함`을 차례로 적었다.
두 번째 칸엔 `4K 행사장 배너 원본`, `라이브옵스 리플레이 번들`, `출시 첫 주 미사용 영상 리소스`를 적었다.
마지막 칸엔 `확장 연출`, `고급 통계 시각화`, `추가 패키지 세트`를 적었다.
오민서가 바로 말했다.
“대표님, 배너 세트는 마케팅이 아니라 운영 보험입니다. 당일 현장, 외부 광고, 사전예약 페이지가 전부 물려 있어요.”
“압니다.”
“그런데 빼겠다고요?”
“오늘 심사 통과가 보험보다 먼저입니다.”
민서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손가락이 체크리스트 종이 모서리를 세게 눌렀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그녀가 단순히 반대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 사람도 이미 몇 번은 무너지는 런칭을 겪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라도 덜 잃으려고 자산을 과하게 껴안고 있었다.
나는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민서 팀장. 오늘 꼭 지켜야 하는 운영 조건을 숫자로만 다시 말해 주세요.”
그녀는 잠깐 멈췄다가 바로 답했다.
“당일 제출. 첫 다운로드 권장선 1.8GB 아래. 피처드 슬롯 심사 자료 누락 0건.”
“좋습니다.”
나는 두 번째 칸의 `4K 행사장 배너 원본` 옆에 가로줄을 하나 더 그었다.
“원본은 뺍니다. 대신 심사 제출본엔 스토어용 최적화 세트만 남겨요. 행사장 대응본은 별도 보관 경로로 분리합니다.”
한도겸이 곧바로 물었다.
“분리하면 빌드 다시 뽑아야 합니다. 검증 시간 줄어듭니다.”
“얼마나 걸리죠?”
“정리 40분, 재패키징 55분, 최소 회귀 테스트 50분.”
오민서가 시계를 봤다.
“그러면 마감 20분 남기고 제출입니다.”
“그 20분이면 충분합니까?”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포기하기엔 아직 이르다.
그때 해원이 태블릿을 넘기다 말고 화면 하나를 멈췄다.
“잠깐.”
그녀가 스크린에 이미지를 띄웠다. 사전예약 페이지용 대표 배너였다. 네온색 우주 정거장 위로 캐릭터 실루엣과 과장된 패키지 아이콘이 잔뜩 붙어 있었다.
“이거, 지금 게임이랑 얼굴이 다릅니다.”
오민서가 미간을 좁혔다.
“클릭 받으려고 강조한 겁니다.”
“강조가 아니라 사기 직전이에요. 유저는 탐사 게임 들어오는데 첫 화면은 현질 행사장처럼 보이잖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숫자가 하나로 묶였다.
잔존율, 클릭률, 심사 일정. 전부 따로 노는 문제가 아니었다. 같은 게임을 서로 다른 얼굴로 팔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충돌이었다.
“좋네요.”
내가 말했다.
“오늘 줄일 건 용량만이 아닙니다. 얼굴도 줄여야 해요.”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꽂혔다.
“민서 팀장, 클릭률 때문에 과장한 배너 세트 중 스토어 심사 필수본만 남깁니다. 해원 씨, 지금 살린 튜토리얼 감각과 맞는 대표 이미지 한 장으로 다시 정리해 주세요. 행사장용 과장 세트는 오늘 제출본에서 제외합니다. 도겸 씨는 그 자산 분리하고 빌드 다시 묶으세요.”
오민서가 바로 물었다.
“CTR 떨어지면요?”
“떨어질 수도 있죠.”
나는 그녀를 똑바로 봤다.
“그런데 눌러 놓고 첫날 나가게 만드는 클릭보다, 조금 덜 눌러도 남는 클릭이 낫습니다. 어젯밤에 우리가 겨우 되찾은 게 그거잖아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윤해원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화이트보드 왼쪽에 선을 하나 더 긋고 `게임이 약속하는 얼굴`이라고 적었다.
“좋아요. 그러면 아트팀은 배너를 새로 뽑겠습니다.”
그녀가 오민서를 봤다.
“클릭만 세게 받는 화면 말고, 실제 첫 지역 감각을 보여 주는 쪽으로.”
오민서는 반박하려다 멈췄다.
대신 아주 짧게 물었다.
“두 시간 안에 됩니까?”
“한 장이면 돼요.”
해원이 답했다.
“대신 아무도 중간에 더 얹지 마요.”
한도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리플레이 번들과 행사장 원본부터 뺍니다. 저사양 테스트 두 대는 계속 돌릴게요. 항로선 스트리밍은 유지하되, 배경 리소스 묶음은 한 단계 낮추겠습니다.”
오민서가 한숨을 삼켰다.
“좋습니다. 그럼 운영은 심사 자료를 제출용 세트 기준으로 다시 맞출게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말하세요.”
“오늘 마감 직전까지도 용량이 안 내려오면, 마지막 우선순위는 대표님이 직접 정해 주세요. 누구 탓인지 기록 남기지 말고요. 결정을 미루는 순간이 제일 위험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 도겸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그건 제가 기록으로 남깁니다. 기술 책임은 제가 질게요.”
해원도 곧장 말했다.
“아트 쪽도요. 대신 게임 얼굴을 다시 패키지 창으로 돌리진 맙시다.”
나는 둘을 번갈아 봤다.
새벽까지는 각자 살아남으려고 일하던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같은 기준을 두고 자기 책임을 걸고 있었다.
이게 첫 내부 동맹이었다.
우리는 곧바로 흩어졌다.
나는 회의실 밖 복도에 재패키징 진행표를 직접 붙였다. 정면에는 제출 마감 시각, 왼쪽에는 자산 분리 항목, 오른쪽에는 회귀 테스트 체크박스를 붙였다. 개발실 안쪽에선 도겸이 번들을 분리하는 키보드 소리가 끊기지 않았고, 아트팀 자리 쪽에선 해원이 네온색을 죽이고 항로선이 먼저 보이는 구도로 대표 배너를 다시 잡고 있었다.
오민서는 운영 자료 폴더를 통째로 갈아엎듯 정리했다. 행사장 원본, 사전예약 페이지, 스토어 심사본이 뒤섞여 있던 경로를 분리하면서도 그녀는 한 번도 손을 늦추지 않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복도 끝 프린터에서 체크리스트가 또 길게 뽑혀 나왔다.
오민서가 종이를 손에 든 채 개발실로 들어왔다.
“대표님, 하나 더 있습니다.”
그녀는 출력물을 내 앞에 내밀었다.
`첫 결제 유도 배너 애니메이션 리소스`
`자동 재생 미리보기`
`심사 첨부 설명용 스크린샷 세트`
“이 세 개도 지금 제출 묶음에 붙어 있습니다. 예전 런칭 매뉴얼에서 통째로 복사된 거예요.”
해원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첫 결제 유도 배너 애니메이션까지 왜 들어가요? 그건 게임 안 켜도 과금부터 보이게 하겠다는 생각의 잔재잖아요.”
오민서도 곧장 물러서지 않았다.
“잔재든 뭐든, 그걸 빼면 마케팅팀은 클릭률 방어 장치 하나 더 잃었다고 난리 낼 겁니다.”
“유저가 눌렀다가 바로 지울 이유를 더 만드는 장치겠죠.”
나는 둘 사이로 손을 내밀어 종이를 받았다.
예전 팀은 매번 같은 방식으로 불안을 견뎠을 것이다. 지표가 흔들릴수록 팝업을 더 키우고, 자산을 더 얹고, 설명을 더 붙이고, 보험을 더 쌓는다. 그러다 결국 게임이 아니라 두려움이 만든 껍데기만 무거워진다.
“이것도 뺍니다.”
오민서가 곧장 물었다.
“마케팅이 들고일어나도요?”
“오늘은 일어날 시간도 없어요.”
나는 체크리스트에 직접 줄을 그었다.
“지금 필요한 건 클릭을 구걸하는 장치가 아니라, 눌렀을 때 실망시키지 않는 첫 화면입니다.”
잠깐 뒤, 도겸 쪽에서 짧은 욕설이 튀었다.
우리가 동시에 그를 봤다. 그는 모니터 두 개를 번갈아 보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왜요?”
“행사장 원본만 분리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물려 있던 로비 배너 경로까지 같이 끊겼습니다. 지금 상태로 빌드 묶으면 첫 진입 화면에서 빈 프레임 뜰 수 있어요.”
해원이 바로 그의 자리 옆으로 붙었다. 오른쪽 모니터에는 경로 참조 트리가, 왼쪽에는 현재 로비 시안이 떠 있었다. 정면 미리보기 창 한가운데 검은 사각형이 뜬 걸 보자, 모두가 동시에 표정을 굳혔다.
오민서가 낮게 말했다.
“그 빈 프레임, 심사 걸리면 끝입니다.”
“알아요.”
도겸이 짧게 답했다.
“경로를 새로 물리면 되는데, 그러면 빌드 다시 돌아야 합니다.”
해원은 미리보기 창을 한 번 확대해 보더니 말했다.
“잠깐. 이거 굳이 배너를 세 장 돌릴 필요 없어요. 정지 이미지 한 장이면 첫 진입 공백 막을 수 있어요.”
오민서가 즉시 반응했다.
“자동 회전 배너를 포기하자고요?”
“어차피 오늘은 포기할 거 많아요.”
해원이 차갑게 말했다.
“대신 한 장을 제대로 보여 줍시다.”
그 말에 나는 바로 결정했다.
“회전 배너 버립니다. 첫 진입 정지 이미지 한 장으로 통일해요. 대신 그 한 장은 튜토리얼에서 유저가 실제로 보게 될 감각과 맞아야 합니다.”
오민서가 나를 똑바로 봤다.
“대표님은 오늘 계속 `덜 보여 주는 쪽`을 고르고 있네요.”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헛것을 덜어 내는 겁니다.”
민서는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완전히 납득한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방금 전보다 더 이상 반사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녀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조건 많이 싣는 게 준비가 아니라는 걸.
오전 열 시 사십 분쯤, 해원이 새 대표 이미지를 들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깨진 정거장 난간이 화면 아래를 사선으로 가르고 있었고, 발밑에서 살아난 푸른 항로선이 정면 통신탑 쪽으로 길을 열고 있었다. 패키지 아이콘은 사라졌고, 대신 멀리 파편대 너머로 공간이 더 있다는 암시만 남아 있었다.
오민서는 그 이미지를 한참 보더니 처음으로 감상이 섞인 말을 했다.
“이건… 확실히 눌렀을 때 다른 걸 기대하진 않겠네요.”
해원은 짧게 대답했다.
“속이지 않는 얼굴이니까요.”
나는 그 짧은 대화를 들으며, 오늘 회의가 단순히 빌드 용량을 줄이는 작업이 아니었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 우리는 파일 몇 개를 버리는 게 아니라, 이 회사가 숫자를 다루는 방식을 바꾸고 있었다.
오전 열한 시 오십 분.
첫 재패키징 결과가 나왔다.
1.84GB.
권장선 바로 위였다.
회의실 안에서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한 채 숫자만 봤다. 0.04. 고작 그만큼이었는데도, 그 0.04가 오늘을 통째로 밀어 버릴 수 있었다.
오민서가 먼저 휴대폰을 들었다. 그녀는 플랫폼 담당자와 짧게 통화하며 제출 예상 시각을 눌러 잡고 있었다.
“네, 당일 제출 라인 유지 요청드립니다. 자료 누락 없이 넣겠습니다. 네, 압니다. 2시 이후면 슬롯 재배정 들어가는 거.”
통화를 끊은 그녀의 얼굴은 더 창백해졌지만, 목소리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두 시 넘기면 끝입니다. 지금부터는 한 줄이라도 줄이는 쪽으로만 갑시다.”
해원이 그 말을 듣고 모니터를 가리켰다.
“그러면 배경 광원보다 이 카피부터 지워요.”
사전예약 페이지 미리보기 상단에는 굵은 문장이 떠 있었다.
`첫 구매 한정 초고속 성장 패키지 지급`
해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 문장, 우리가 방금 바꾼 얼굴이랑 정반대예요. 탐사하러 들어오는 사람한테 입장하자마자 결제부터 떠민다고 광고하는 셈이잖아요.”
오민서가 바로 반박했다.
“그 카피는 전환율 때문에 남겨 둔 겁니다.”
“전환율만 남기고 유저는 날리는 문장이겠죠.”
나는 둘의 말을 끊었다.
“카피도 바꿉니다.”
오민서가 나를 봤다.
“지금 문구 수정까지 하면 심사 설명 자료도 다시 맞춰야 합니다.”
“그래도 합니다.”
나는 미리보기 상단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우린 오늘 내내 같은 문제를 보고 있었어요. 게임 안에서 먼저 과금부터 들이미는 방식, 게임 바깥에서 클릭부터 뜯어내는 방식. 둘 다 같은 실패예요.”
해원이 키보드를 끌어와 새 문구를 적었다.
`당신의 첫 항로가 남는 탐사 RPG`
과장도, 할인도, 조급한 약속도 없었다. 대신 지금 우리가 살리려는 감각은 정확히 들어 있었다.
오민서는 그 문구를 읽고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짧게 말했다.
“…클릭률은 장담 못 합니다.”
“대신 눌렀을 때 왜 들어왔는지는 안 잊겠죠.”
내가 답했다.
그 한 줄이 오늘 우리가 버리는 것과 남기는 것을 다시 분명하게 갈라 줬다.
“좋아요.”
오민서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구로 제출 자료 다시 맞추겠습니다. 대신 여기서 더 바뀌면 정말 시간 없습니다.”
첫 재패키징 결과가 나왔다.
1.84GB.
권장선 바로 위였다.
“아직 모자랍니다.”
오민서가 말했다.
도겸은 모니터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영상 미리보기 캐시가 붙어 있습니다. 이거 빼면 더 내려갑니다. 대신 런칭 직후 운영툴 미리보기가 불편해져요.”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빼세요.”
해원이 자리에서 고개만 돌려 물었다.
“배경 광원 한 단계 낮춘 건 체감 괜찮아요?”
“지금 바로 비교 들어갑니다.”
QA가 테스트폰 두 대를 들고 뛰었다. 한 대는 기존 복구 빌드, 다른 한 대는 경량화 빌드였다. 우리는 말없이 플레이를 지켜봤다.
플레이어가 첫 난간을 돌고, 항로선이 발밑에서 살아나고, 통신탑 무전이 한 박자 늦게 따라왔다. 연출 밀도는 조금 줄었지만 감각은 아직 살아 있었다.
윤해원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됩니다.”
오민서가 곧바로 시간을 불렀다.
“12시 47분.”
다시 빌드를 묶었다.
오후 한 시 이십이 분, 숫자가 다시 떴다.
1.71GB.
회의실 안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지만 끝은 아니었다. 심사 자료 업로드, 체크리스트 검수, 제출 버튼까지 아직 남아 있었다.
오민서는 내 옆에 서서 마지막 항목을 읽었다.
“앱 설명, 연령 등급, 결제 고지, 대표 이미지, 첫 다운로드 용량, 제출 버전 체크.”
윤해원이 새로 뽑은 대표 배너를 넘겼다. 과장된 패키지 더미 대신, 깨진 정거장 난간 위를 푸른 항로선이 감싸고 있었다. 자극은 덜했지만, 적어도 저 화면은 실제 게임이 약속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민서는 그 이미지를 한 번 보고, 말없이 제출 세트에 넣었다.
그 침묵이 그녀의 동의였다.
한 시 삼십칠 분, 한 시 오십이 분.
시간이 미끄러질수록 회의실 안의 말수는 오히려 줄었다. 누구도 괜한 위로를 하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건 말이 아니라 남은 체크칸을 하나씩 지워 가는 손이었다.
오후 한 시 오십구 분, 오민서가 마지막 확인을 끝냈다.
“대표님.”
나는 마우스를 잡았다.
이 버튼 하나에 오늘의 회의, 새벽의 복구, 팀이 겨우 맞춰 세운 기준이 전부 묶여 있었다.
클릭했다.
업로드 진행 막대가 천천히 차올랐다.
회의실 정면 스크린 아래,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팀원들이 하나둘 서 있었다. 누구도 환호하지 않았다. 아직 결과가 온 게 아니니까.
100퍼센트.
제출 완료.
업로드 완료 문구가 뜬 직후에도 아무도 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손을 바쁘게 놀리던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 자리에 기대 선 채 모니터만 보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게 아니라, 간신히 안 끊기고 버틴 실이 아직 손끝에 걸려 있는 느낌이었다.
오민서는 가장 먼저 체크리스트를 뒤집었다. 뒷면까지 전부 확인한 뒤에야 그녀는 펜 끝으로 마지막 칸을 눌렀다.
“자료 누락 없습니다. 제출 세트 정상.”
그 말은 짧았지만, 회의실 안 누구보다 그 문장을 오래 기다린 사람도 아마 그녀였을 것이다.
그제야 한도겸이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목을 뒤로 젖혔다. 윤해원은 말없이 대표 배너가 뜬 화면을 캡처해 저장했다. 다들 같은 자리에 있었는데, 방금 전보다 회사 바닥이 아주 조금 덜 꺼져 보였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짧게 숨을 골랐다. 오늘 우리가 겨우 지켜 낸 건 출시 일정만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언어로 싸우던 사람들이 같은 기준표 하나 앞에 서기 시작했다는 사실, 그게 더 컸다. 그 변화는 숫자보다 오래 갈 자산이었다.
오민서가 의자 등받이에 짧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
“마감 38분 전.”
한도겸이 그제야 웃음 비슷한 숨을 뱉었다.
“진짜 간당간당했네요.”
윤해원은 스크린 속 대표 이미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번엔, 적어도 우리가 무슨 게임 내놓는지는 알고 밀어냈네요.”
그 말이 끝난 순간, 내 오른쪽 시야에 반투명 문서가 다시 떠올랐다.
방금 제출 완료 화면 뒤로 새 그래프가 겹쳐졌다.
`사전예약 페이지 CTR 급락 예측`
`동일 시간대 경쟁작 광고 집행 증가`
`런칭 전선 외부 압박 가능성 상승`
그래프 오른쪽 끝이 칼로 잘린 것처럼 갑자기 꺾여 있었다.
나는 표정을 굳혔다.
오민서가 먼저 눈치챘다.
“또 봤습니까?”
“네.”
한도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엔 뭡니까.”
나는 스크린에 방금 넣은 대표 배너를 다시 띄웠다. 그리고 그 옆에 미래 문서가 보여 준 꺾인 그래프를 머릿속으로 겹쳐 봤다.
우리는 오늘 심사는 지켰다.
그런데 누군가는, 우리가 심사 통과에 매달리는 동안 출시 전선 바깥에서 이미 다른 싸움을 걸고 있었다.
“광고입니다.”
내가 낮게 말했다.
“출시 페이지를 열기도 전에, 누가 먼저 유저 시선을 사 가고 있어요.”
회의실 안에 다시 긴장이 차올랐다.
잔존율을 살렸고, 제출도 맞췄다.
이제 남은 건 게임을 만드는 싸움이 아니라, 게임이 보이게 만드는 전쟁이었다.
✦ 작가의 말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