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심과 쾌감 사이
지저귀는 산새 소리가 기분 좋게 귓가를 간질였다.
남궁설(南宮雪)은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렸다. 시야로 쏟아져 들어온 것은 안휘성(安徽省) 남궁가의 화려한 비단 천장이 아니었다. 거친 나뭇결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투박한 나무 천장이었다. 코끝을 맴도는 것은 피비린내와 습한 진흙 냄새 대신, 놀랍도록 맑은 공기와 짙고 은은한 단향목(檀香木) 향기였다.
"여기... 는?"
갈라진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새어 나왔다. 간밤의 기괴했던 악몽이 파편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폭우, 쌍칼을 휘두르던 마두, 허벅지를 꿰뚫던 끔찍한 고통, 그리고... 모든 것을 단숨에 찰흙처럼 뭉개버리던 반쯤 감긴 눈동자의 나른한 수법.
설은 화들짝 놀라며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우두둑거리는 척추의 관절음과 함께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단전의 내공조차 텅 비어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녀를 가장 당황하게 만든 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었다. 하반신을 감싸고 도는 낯설고 서늘한 감촉이었다.
"내, 내 바지가...!"
설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쳤다. 늘 단정하게 그녀의 다리를 감싸던 푸른 무복(武服)의 우측 하의가 허벅지 위쪽부터 완전히 뜯겨나가 있었다. 아니, 뜯겼다기보다는 예리한 칼로 조심스럽게 오려낸 것에 가까웠다. 덕분에 그녀의 뽀얗고 탄탄한 오른쪽 맨살이 창문으로 스며드는 오전의 환한 햇살을 받으며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단순히 살갗이 드러난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부러진 뼈가 튀어나왔던 끔찍한 창상(創傷) 부위 주변으로 끈적끈적한 모종의 갈색 약재가 두껍게 발려 있었고, 그 위로 엉성하지만 단단하게 부목이 덧대어져 있었다.
강호 무림의 정파(正派) 규수를 자처하며 평생을 남녀칠세부동석의 엄격한 규율 속에서 살아온 그녀였다. 가전 무공을 수련할 때조차 살갗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어떤 외간 남자가 자신의 옷을 강제로 찢고, 속살을 낱낱이 들여다보며 직접 약까지 발랐단 말인가?
'치욕이다... 이건 남궁세가 차기 가주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치욕...!'
설은 수치심과 분노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허리춤의 검을 뽑아 이 불경한 짓을 저지른 자의 목을 쳐야 했다. 하지만 검은커녕, 그녀의 손 닿는 어느 곳에도 무기라 할 만한 것은 없었다. 낡은 평상 옆 조그만 나무 선반 위에 놓인 건, 날계란 두어 개와 물이 담긴 옹기그릇, 그리고 조잡한 침통뿐이었다.
끼이익.
그때, 귀를 거슬리는 소음과 함께 판자문이 열렸다.
설은 반사적으로 남은 기력을 모아 살기 어린 눈빛을 쏘아보냈다. 문지방을 넘고 들어온 자는 간밤 폭우 속에서 본 바로 그 남자였다. 대충 걸친 칙칙한 회색 장삼(長衫).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흑발. 목에 걸린 낡은 염주. 세숫대야와 정체불명의 갈색 고약이 담긴 절구를 들고 들어오는 그의 눈은 여전히 반쯤 감긴 채 귀찮음을 한가득 담고 있었다.
혜지(慧智)였다.
"일어났소?"
그의 인사는 아침에 길을 걷다 이웃집 개구리를 본 것만큼이나 건조했다. 설은 이를 부득 부득 갈며 소리쳤다.
"네, 네놈이 감히 내 몸에 무슨 마수를 뻗친 것이냐! 네놈이 정녕 살기를 포기한 탕아란 말이냐!"
차갑게 날 선 살기. 일반인이라면 그 기백만으로도 무릎이 꺾일 분노였다. 하지만 혜지는 설의 격노를 가볍게 무시하며 대야를 선반 위에 툭 내려놓았다.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은 채, 소매를 걷어붙이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산산조각 난 뼛조각 맞추느라 밤새 고생한 사람한테 아침부터 소리를 빽빽 지르다니. 안휘성 촌구석의 양반들은 예절이라는 걸 모르나 보군. 뼈가 썩어 들어가게 놔둘 걸 그랬소."
"뭐, 뭣이?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그리고 그 잘난 가문의 보검인지 뭔지는 저기 구석에 얌전히 놔뒀으니 도둑맞았을까 봐 걱정 마시오. 고철 덩어리 따위, 주막에 내다 팔아도 엽전 한 닢 안 쳐주겠지만."
혜지가 턱짓으로 가리킨 방 한구석에는 그녀의 검이 대충 쓰러져 있었다. 설은 다시 한번 분통이 터졌다. 남궁세가의 명운이 담긴 신검을 한낱 고철 덩어리 취급하다니. 당장이라도 내공을 끌어올려 그 건방진 입을 찢어놓고 싶었지만, 슬프게도 그녀의 육체는 단 한 줌의 기도 끌어낼 수 없는 상태였다.
설은 심호흡을 하며 혜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간밤 폭우 속에서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살피지 못했지만, 지금 찬찬히 뜯어본 그의 모습은 참으로 기괴했다. 무공의 고수라기엔 단전의 내공이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렇다고 평범한 촌부라기엔 그 송장처럼 창백하고 수려한 외모와 이질적인 분위기가 도저히 설명되지 않았다. 가장 섬뜩한 것은 그의 무심함이었다. 무림 최고의 미녀 중 하나로 꼽히는 자신을, 허벅지가 훤히 드러난 반라(半裸)의 상태로 보고 있으면서도 혜지의 눈동자에는 정욕(情慾)은커녕 털끝만 한 동요조차 없었다. 마치 정육점 주인이 매달린 고깃덩어리를 감상하는 듯한, 지극히 사무적이고 관찰자적인 시선이었다.
"자, 그럼 잡설은 그만두고 치료를 이어가 볼까."
혜지가 걷어붙인 팔을 물에 휘휘 헹구더니, 갈색 고약을 손가락에 듬뿍 묻힌 채 설의 침상으로 다가왔다. 설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오, 오지 마라! 네 놈의 시커먼 수작에 놀아날 줄 아느냐!"
"수작은 무슨. 마비산이라도 먹여 대가리를 깨버리고 싶지만 가난한 의원에 그런 비싼 약이 있을 리 없지. 부러진 뼈를 생으로 맞춰야 하니, 혀를 깨물기 싫으면 조용히 입이나 벌리시오."
혜지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설이 반항할 틈도 없이, 혜지의 유난히 길고 창백한 두 손가락이 남녀칠세부동석의 예법 따위는 개나 줘버렸다는 듯 다짜고짜 설의 앵두 같은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읍?! 으읍?!"
깜짝 놀란 설의 입안으로 두툼하게 접힌 면포가 억지로 쑤셔 박혔다. 평생 남자의 손가락 하나 닿아본 적 없는 입술점막을 무자비하게 침범당한 설은 굴욕감에 파르르 떨었다.
"얌전히 계시오.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아플 거요."
혜지의 손이 마침내 설의 훤히 드러난 오른쪽 허벅지에 닿았다.
'히익...!'
설은 하마터면 속으로 비명을 지를 뻔했다. 남자의 손이었다. 그것도 무공을 연마해 억세고 투박한 무인(武人)의 손이 아닌,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차디찬 손결. 혜지의 뱀처럼 유연한 긴 손가락이 그녀의 뽀얀 허벅지를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감싸 쥐었다. 마치 그녀의 살갗 아래에 숨겨진 신경과 근육의 배열을 낱낱이 투시하려는 듯, 기분 나쁘고도 기묘한 밀착감이었다.
'이, 이 변태 새끼가 어딜 만지는...! 당장 치우지 못...!'
설의 눈동자가 터질 듯 분노를 뿜어냈다. 그녀는 남은 힘을 다해 다리를 거둬차려 했다. 그러나 혜지의 손가락이 특정 혈도를 지그시 누르는 순간, 설의 하반신은 마치 벼락을 맞은 듯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혜지의 시선이 설의 허벅지 한구석,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은 끔찍한 상처 부위에 고정되었다. 그의 눈빛이 일순간, 귀찮은 것을 억지로 치우는 듯한 나른함에서 극도의 예리함을 띤 외과의의 그것으로 돌변했다.
'대퇴골 간부 복합 골절. 뼈의 파편이 대동맥을 위협하는 골치 아픈 상태. 일반적인 접골술로는 어림도 없지. 손가락 끝으로 미세한 파편까지 짚어내어 원래의 구조로 조립해야 한다.'
혜지의 단전은 고요했다. 하지만 그의 열 손가락 끝에는, 악마적 지식과 현생의 기이한 체질이 결합된 결정체, 마귀를 부리는 손가락(魔使指)의 기운이 은밀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우둑.
혜지의 손가락이 상처 주변의 근육을 강하게 파고들며 첫 번째 뼛조각을 제자리로 밀어 넣었다.
"으읍!!!!"
설의 몸이 활처럼 튕겨 올랐다. 상상을 초월하는 생고통. 그것은 수백 개의 바늘이 골수를 후벼 파는 듯한, 영혼마저 너덜너덜하게 찢어버릴 것 같은 끔찍한 통증이었다. 설은 입에 문 수건을 찢어버릴 듯 턱에 힘을 주며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그러나 혜지의 양손은 바위처럼 굳건했다. 아니, 바위라기보다는 먹잇감을 옭아맨 거대한 비단뱀의 똬리 같았다. 혜지의 길고 차가운 손가락들이 춤을 추듯 설의 허벅지 위를 미끄러지며, 어긋난 근육과 비틀린 혈도를 동시에 압박하고 주물렀다.
우드득, 뚝, 딱.
잔인한 파열음이 내실을 울렸다. 뼈를 부수는 고문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조각난 뼈가 오차 없이 맞물리며 제자리를 찾아가는 창조의 소리였다.
혜지의 손가락이 허벅지 안쪽 깊숙한 곳, 혈류가 심각하게 정체되어 썩어 들어가기 직전인 대퇴 사타구니 안쪽의 급소를 향해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여기군. 죽은피가 뭉쳐 기맥을 꽉 막고 있는 지점. 이곳을 풀어내야 뼛조각에 새 살이 돋는다.'
혜지는 아무런 흑심 없이, 순수한 치료 목적으로 그 민감하고 내밀한 부위를 강하게 쥐어짰다.
그 순간이었다.
"하읍... 아앗?!"
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입에 물고 있던 수건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의 통증이 아니었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의 바닥, 그 심연 끝에서 무엇인가가 폭발했다. 혜지의 손가락이 죽은피를 강제로 터트리고 기맥을 강제로 관통시킨 순간, 꽉 막혀있던 단전의 내공이 미친 듯한 속도로 역류하며 전신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녀가 평생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오장육부를 녹여버릴 듯한 극강의 쾌락이었다. 척수액이 끓어오르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강제로 뚫린 혈도 사이로 혜지의 차갑고 집요한 손가락 감촉이 증폭되어 뇌를 직접 타격하는 듯했다.
"히으윽! 하앙... 아, 앗! 멈, 멈춰...!"
고결한 남궁세가의 차기 가주. 강호 무림을 호령하던 얼음 요정의 입에서, 자신조차 믿을 수 없는 음탕하고 노골적인 교성이 터져 나갔다. 부러진 뼈가 실시간으로 맞춰지는 공포스러운 고통과, 전신을 관통하는 미친 듯한 쾌락이 잔인하게 뒤섞여 그녀의 이성을 철저하게 박살 내고 있었다.
설은 쾌락에 저항하려 눈물을 찔끔 흘리며 몸을 비틀었다. 혜지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허벅지를 파고드는 혜지의 손길에서 묘한 중독적인 갈망이 피어올랐다. 통증을 쾌락으로 강제 치환해버리는 혜지의 무자비한 손길 앞에, 그녀의 꼿꼿했던 자존심은 한낱 젖은 휴지 조각처럼 찢어지고 있었다.
"시끄럽소. 아직 근육 결이 반도 안 맞물렸는데. 호들갑 떨지 말고 가만히 계시오."
상기된 얼굴로 헐떡이는 절세 미녀를 발아래 두고도, 혜지의 목소리는 여전히 하품이 섞여 있을 만큼 건조하고 귀찮았다. 그는 설의 몸부림을 그저 환자의 앙탈쯤으로 치부하며, 더욱 깊고 집요하게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아앙! 아, 안 돼! 거긴...! 흣, 하아앙...!"
쏟아지는 오전의 햇살 아래, 무의연구소의 비좁은 내실은 고통과 처절한 반항을 집어삼킨 치명적인 쾌감의 신음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폭력밖에 모르던 남궁설의 무릎이, 나른한 손끝에서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 첫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