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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투성이 불청객 일러스트

피투성이 불청객

초여름의 하남성(河南城). 며칠 전부터 시작된 장마는 멎을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굵은 장대비가 번개와 함께 세차게 대지를 때리고 있었다. 하늘은 먹물을 풀어놓은 듯 검었고, 향림촌(香林村) 변두리의 비포장도로는 금세 질척한 황토 뻘밭으로 변해버렸다.

찌그럭, 철퍼덕.

무거운 쇳덩이를 진창에 억지로 끌고 가는 듯한 발걸음 소리가 요란한 빗소리 사이로 간간이 섞여 들었다. 먹구름 사이로 순간 번쩍하고 내리친 번개가 골목길을 걷는 한 인영(人影)을 하얗게 비췄다.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젖은 흑발. 날카롭고 오만한 눈매. 빗물에 젖어 살갗에 달라붙은 푸른 무복(武服)은 본래의 우아한 빛을 잃고 흙탕물과 검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강호 무림에서도 안휘성(安徽省)을 꽉 쥐고 있는 명문거족, 남궁세가(南宮世家)의 가주 후보. 남궁설(南宮雪)이었다.

"대체... 여긴 어디지?"

설은 피가 말라붙은 입술을 깨물며 짙은 당혹감을 삼켰다. 안휘성에서 마두를 추격하던 중 빗속의 갈림길에서 당연히 북쪽이라 확신했던 곳이 문제였다. 치명적인 길치인 탓에 본대와 완벽하게 고립되어 하남성 끄트머리까지 미끄러져 왔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오직 쌍칼 마두만이 집요하게 그녀의 뒤를 쫓고 있었다.

"하아... 윽!"

퍼붓는 비를 맞으며 설은 낡은 토담에 기대어 비틀거렸다. 오른손에 꽉 쥔 가문의 보검은 검집조차 잃어버린 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 아래쪽, 푸른 무복의 오른쪽 허벅지 부근이 무참히 찢어져 있었다. 폭우에 씻겨 하얗게 드러난 살점 사이로 부러진 뼛조각이 섬뜩하게 비죽 솟아 있었다.

쌍칼 마두의 매복에 당해 입은 심각한 복합 골절. 일반인이라면 통증만으로도 정신을 잃었을 끔찍한 고통이었다.

'남궁세가의... 차기 가주가 이런 이름 모를 짐승 따위에게...'

설은 이를 부득 갈았다. 부러진 허벅지 뼈가 근육을 찌를 때마다 척수액을 긁어내는 듯한 고통이 뇌리를 강타했지만, 그녀는 신음조차 사치라 여기며 억눌렀다. 약점을 보이고 쓰러지는 것. 사랑받고 동정받는 나약한 여인으로 남는 것. 그것은 그녀의 오만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유일한 공포였다.

스스슥-.

뒤편의 어두운 진창 속에서, 빗소리를 가르는 불길한 발소리가 좁혀오고 있었다. 살의(殺意). 비릿한 피 냄새와 분노로 절여진 짐승의 숨소리. 설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부러진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어 버텼다.

'반 발자국만 들어와라. 동귀어진(同歸於盡)으로 끝내주마.'

설이 비장하게 검을 고쳐 쥐려던 찰나였다. 번개가 한 번 더 내리치며, 토담 너머의 풍경을 환하게 비췄다. 비바람에 거칠게 삐걱대는 조잡한 나무 간판 하나.

[無醫硏究所 (무의연구소)]

'무의연구소? 이곳이 뭐 하는 통뼈 무리들의 도장이란 말인가?'

기다란 약방 터, 혹은 무관(武館)을 연상케 하는 허름한 판잣집. 설의 등 뒤로 쌍칼 마두가 시꺼먼 짐승처럼 튀어 올랐다. 그는 설을 베기 위해 허공에서 양팔을 교차시키며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설이 검을 휘두르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드르륵! 쾅!

연구소의 허름한 판자문이 벼락치듯 신경질적으로 열렸다. 설도, 공중에 뜬 마두도 일순 흠칫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이 거친 폭풍우와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과는 억만 광년쯤 뚝 떨어진 것 같은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무명으로 대충 지은 회색 장삼(長衫). 목에 대충 걸어놓은 낡은 염주. 그리고 결정적으로, 잠에서 막 깬 듯 부스스한 흑발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반쯤 감긴 나른하고 무심한 눈동자.

혜지였다.

"남의 집 앞에서 쇳소리 내지 마시지."

장대비가 쏟아지는 마당, 핏발 선 눈동자의 마두와 사경을 헤매는 묘령의 여검객을 앞에 두고도, 혜지의 목소리엔 건조한 귀찮음만이 뚝뚝 묻어났다. 심지어 그는 길고 뱀 같은 손가락으로 가볍게 하품까지 틀어막고 있었다.

"시끄러워 잠을 깰 지경이오."

그 태도는, 마치 한밤중에 길고양이가 쓰레기통을 뒤지는 소리에 잠이 깬 동네 아저씨의 짜증과 다를 바가 없었다. 쌍칼 마두의 얼굴이 순식간에 모욕감으로 일그러졌다.

"비켜라, 이 미친 땡중놈아!"

마두는 목표를 남궁설에서 혜지로 급선회했다. 두 자루의 시퍼런 칼날이 삼라만상을 베어버릴 듯한 기세로 비바람을 뚫고 혜지의 정수리를 향해 쇄도했다. 소름 끼치는 살기.

설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아, 일반인이 휩쓸렸다.' 그녀는 다리의 고통을 잊고 비명을 질렀다. "피하시오!"

그러나 설의 외침이 폭우 속에 묻히기도 전이었다.

혜지가 한쪽 다리를 내밀어 질척한 진창을 가볍게 쓰다듬듯 미끄러졌다. 무공 보법이 아니었다. 그저 귀찮은 벌레를 치우기 위한 무심하고 부드러운 유영(遊泳). 마두의 칼끝이 혜지의 회색 장삼 깃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쳤다.

스윽.

그 찰나, 혜지의 유난히 길고 뼈대가 유연한 열 손가락이 마두의 거친 양팔을 뱀처럼 휘감았다. 단전의 타격감이나 폭발적인 내공 운용의 기척은 전혀 없었다. 혜지의 눈은 여전히 반쯤 감겨 있었다.

'요골과 척골 사이의 이음새, 견갑골의 불안정한 탈골 포인트.'

혜지의 머릿속에 마두의 뼈와 근육, 신경의 구조가 투명하게 겹쳐졌다. 오직 파괴만을 일삼던 마두의 억센 근육은, 비틀린 기맥을 매만지는 화공두타의 절대적 안마술, 마귀를 부리는 손가락(魔使指) 앞에서는 그저 조잡하게 엉킨 실타래에 불과했다.

우득! 우드드득!

소름 끼치는 파열음. 설은 두 눈을 굳게 감았다가 다시 떴다. 피가 튀지 않았다. 신체 부위가 잘려 나가지도 않았다. 그러나 쌍칼을 쥐고 있던 마두의 양팔은 마치 찰흙 인형의 그것처럼 기괴하고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비틀려 있었다. 관절이 탈골되고 신경 다발이 한순간에 마비된 것이다. 마두는 고통스러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흰자위만 허옇게 까뒤집고는 빗물 웅덩이로 참개구리처럼 처박혔다. 단 한 번의 스침이었다.

"……?"

설은 피가 빠져나가는 어지럼증 속에서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공의 초식이 아니야. 검기도, 장력도 없었다. 그저... 관절을 비틀었을 뿐인데?'

강호에서 숱한 비무를 보아온 그녀였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가 보여준 수법은 어떤 가전 무공이나 마교의 비술로도 해석되지 않는 완벽한 쾌재(解體)의 손길이었다. 뼈와 근육의 연결고리, 그 알량한 헛점을 단숨에 파고들어 조율해버리는 아득한 솜씨.

전율 속에 설의 시선이 혜지의 길고 뱀 같은 손가락에 머물렀다. 엄청난 살기를 뿜어내던 고수를 단숨에 진창의 찰흙 덩어리로 만들어버린 마귀의 손.

"쯧."

혜지는 마당에 엎어진 마두를 발끝으로 툭 건드려보고는 귀찮다는 듯 혀를 찼다. 마두는 입에 거품을 물고 완전히 혼절해 있었다. 어깨와 팔꿈치의 탈골 상태를 보아하니 당분간 제 손으로 밥을 떠먹기도 힘들 터였다.

그는 곧이어 시선을 돌려, 토담에 기대어 헐떡이는 핏덩이 소녀를 건조하게 내려다보았다. 짙은 핏물과 빗물에 절어있는 푸른 무복, 그리고 하얗게 돌출된 복합 골절의 참혹한 상처. 빗물이 끊임없이 상처 부위를 때리고 있었지만, 설은 입술을 깨문 채 악착같이 의식을 부여잡고 있었다.

혜지의 시선이 설의 부러진 허벅지로 향했다.

'대퇴골 간부 복합 골절인가. 뼛조각이 대퇴 동맥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갔군. 운이 좋은 건지 독한 건지. 조금만 지체하면 과다출혈이나 감염으로 다리를 잘라야 할 텐데.'

하지만 혜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동정이나 위로와는 거리가 멀었다.

"피도 많이 흘렸군. 남의 앞마당을 이따위로 더럽히고."

짜증스러운 중얼거림과 함께, 혜지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설은 본능적으로 검을 치켜들려 했지만, 이미 한계에 달한 육체는 명령을 거부했다. 극한에 달한 척수의 고통과 피로감, 그리고 마두가 쓰러졌다는 사실에서 오는 긴장감의 이완이 동시에 찾아오며 결국 눈앞이 까맣게 점멸했다. 벼락처럼 내리치던 빗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풀썩.

진창으로 곤두박질치려던 설의 몸을, 어느새 다가온 혜지의 탄탄하고 긴 팔이 가볍게 낚아챘다.

"아차."

혜지의 품에 안긴 설은 빗물의 차가운 감촉 대신, 예상외로 옅고 따뜻한 체온을 느꼈다. 그리고 피비린내와 습한 진흙 냄새를 묵직하게 압도하는, 사찰의 대웅전에서나 맡을 법한 은은한 단향목(檀香木)의 내음. 묘한 안도감이 혈관을 타고 흐르며 핏발 선 뇌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따뜻해... 이 냄새는...'

"무겁긴 더럽게 무겁군. 비에 젖어서 그런가."

"귀찮은 호구들이 아주 쌍으로 굴러들어왔네. 내 참."

혜지의 불평기 가득한, 그러나 묘하게 떨림 없는 건조한 음성을 끝으로, 남궁설의 의식은 완전한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다. 다가올 내일, 이 기괴한 안마사 청년에 의해 산산조각 난 자신의 다리가 어떠한 수치스러운 쾌락과 함께 새롭게 '조립'될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무의연구소의 낡은 판자문이 닫히며, 폭풍우 치는 바깥 단절된 채 기묘한 동거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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